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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단 한 명의 대중음악가를 거론한다면 김민기가 아닐까? 직접적 의사 표명 대신 시어를 실은 가락으로 시대를 노래하고 민중을 위로한 그는 사회성과 저항성을 담보한 컨템포러리 포크의 한국적 형태에 접근한 음악가이기도 했다. 록 뮤지컬 < 지하철 1호선 >의 창작과 소극장 학전을 설립 등 예술인의 등대가 되어주었던 그는 말 그대로 한평생 예술을 산 르네상스적 예술가였다.
김민기의 음악
1969년 대학교 첫 학기를 마친 후 김영세와의 듀오 도비두로 경력을 시작한 김민기는 1971년 약관의 나이에 내놓은 첫 독집 < 김민기 >부터 비범했다. '하얀 손수건'처럼 낭창한 번안 포크로 청춘을 어루만진 송창식, 윤형주의 트윈폴리오와 달리 한대수의 '바람과 나'와 미국 동요를 리메이크한 '저 부르는 밤' 제외 자작곡으로 채운 이 음반은 포크의 우산 아래 이채롭다. 재즈 색채의 '종이연'과 플루트가 찬란한 '길', 부드러운 음색을 살린 '그날'까지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반으로 충분하다.
1993년 서울음반에서 < 김민기 1 >, < 김민기 2 >의 형태로 발매된 넉 장의 음반은 1집 이후 음악 세계를 들여다볼 지형도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한국선수단 관련 다큐멘터리의 사운드트랙 '봉우리'와 여성 포크 듀오 현경과 영애가 취입했던 '아름다운 사람', 로맨틱한 감성의 '가을편지'까지 십수년간의 창작품을 망라했다. 러시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기존 작품을 재해석한 2003년 < With Symphony Orchestra Of Russia >와 정재일의 프로듀싱으로 사반세기 만에 부활한 후배들과의 협업품 < 공장의 불빛 >(2004)이 다채로운 음악 세계를 조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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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k the Knife'의 독일 출신 작곡가 쿠르트 바일처럼 극을 위한 음악에 천착했다. 기생 문화를 비판한 1974년 마당극의 일종인 소리굿 < 아구 >와 노동자 인권 억압을 묘사한 1978년 희곡 < 공장의 불빛 >처럼 음악과 서사의 결합에 골몰했고, 이는 후술할 < 지하철 1호선 >과 1983년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 블러드 브라더스 >을 각색한 1998년 학전 뮤지컬 < 의형제 >로 이어졌다.
담담히 읊조리나 알맹이가 오롯한 중저음 가창에 한국의 삶과 희로애락을 담아낸 그는 전설적인 색소포니스트 정성조 쿼텟으로 재즈 색채를 드리운 1집 < 김민기 >와 '바다'에서의 고전 음악적 문법, 다양한 극음악 창작 등 음악적 실험도 다각적이었다. 간결하나 다채로운 김민기의 곡들은 이정선, 이장희와 더불어 세월 무관 빛나는 포크 작가주의를 이룩했다.
저항 없이 저항하는 가수
가장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대중음악가수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으나 그 자체는 각종 사안에 관해 에둘러 말하곤 했다. 시대가 그의 노래를 불렀다. 음악적 동반자 양희은의 음성을 통해 파급력 증폭한 '아침이슬'과 '상록수'는 유신체제 저항가의 전형으로 기록되었으며 여러 작품에 녹아든 인본주의적 서사는 탄압에 눌려있던 이들에게 위로를, 새 시대를 개척하려는 이들에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의 가사는 저항 이상의 휴머니즘을 품었다. '친구' 속 회화적 터치와 '백구'의 순수성, '꽃피는 아이'와 '잃어버린 말'의 철학가적 면모는 은유적이며 함축적이나 결코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명가사들이다. 곱씹을수록 진한 맛이 우러나는 김민기의 언어는 대중가요속 가사의 힘과 미학을 다시금 일깨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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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와 학전
1991년 개관한 소극장 학전은 1990년대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다. 학전이 열고 김민기가 연출한 1994년 록 뮤지컬 < 지하철 1호선 >은 1986년 황정민과 설경구를 비롯한 많은 배우들에게 경력상 분기점이 되었고, < 지하철 1호선 >에 관한 공로로 김민기는 윤이상, 백남준과 더불어 독일 최고 문화 훈장으로 일컬어지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 1986년 독일 베를린에서 초연한 폴커 루트비히 극, 비르거 하이먼 음악의 뮤지컬 < Linie Eins >를 한국 정서에 맞게 재창조했다.
학전 소극장은 수많은 가수의 지지대이자 버팀목이었다. 공연장 부재로 신음하던 이들에게 단비와도 같았든 학전은 한국 포크, 포크 록의 명맥을 잇는 장르 계승의 역할도 수행했다. 김광석을 비롯해 권진원과 윤도현, 장필순이 이곳에서 무대 경험을 쌓았으며 이들은 김민기와 함께 음원을 발매할 만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전설적인 디스크자키 이봉환과의 대담에서 학전 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던 김민기는 오직 예술을 위한 마음으로 33년 역사를 지탱했다.
위암 투병 끝에 향년 71세에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민기에게 수많은 선후배와 동료 음악가들이 추모글을 남겼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김민기의 곡 '잘가오'를 올린 젊은 팬도 많았다. 1집에 '바람과 나'를 제공한 한대수는 “민기 씨, 나의 위대한 친구여, 당신은 결정적 인생을 살았고 엄청난 것을 이뤘습니다”라는 편지로 예술 업적을 드높였고 학전에서 경력의 기틀을 다졌던 윤도현은 '봉우리'를 배경 음악으로 “언제나 제 마음속에 살아 계실 김민기 선생님, 학전도 선생님도 대학로도 아주 그리울 것 같습니다”라며 그리움을 표했다. 묵묵히 구도자적 길을 걸었던 김민기는 음악으로 세상을 비춘 빛이오, 뒤편에서 동료 예술가와 대중을 지켜낸 그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