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6일 JTBC의 < 리얼라이브 >는 AI 기술을 통해 두 다리로 일어선 김혁건이 4옥타브 고음을 가뿐히 소화하는 무대를 구현하며 화제를 가져왔다. 둘의 붉어진 눈시울만큼이나 시청자와 관객 역시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연말이 다가올 즈음, 홍대 인근의 사무실에서 더 크로스의 이시하를 만났다. '완주'가 목표라는 말처럼 그는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 진지하고도 열정을 잃지 않은 표정에서, 더 크로스가 여러 굴곡을 버틸 수 있던 결속의 비결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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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로스 20주년을 맞은 소회가 궁금하다.
20주년이라고 해서 특별한 감정이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 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매년 맞이하는 생일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나가면 밤에 우울한 기분이 들지 않나. 다행히 방송 섭외라든지 IZM 인터뷰 자리에 오게 돼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20주년을 맞이해 받게 된 선물이라 생각한다.
팀에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더 크로스의 모멘트를 정리해 줄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1999년 MBC 아카데미에서 혁건이를 처음 마주친 순간이다. (2003년 1집 발매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 것 아닌가) 맞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혼자 오디션을 보러 다니다 그 친구가 문득 떠올라 연락한 게 시작이었다. 지금 < 슈퍼스타 K >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 Mnet 뮤직 페스티벌 >에서 2001년도 대상을 받고, 그때 소속사와 계약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제 연습생 생활을 2~3년 하게 된 거다. 원래라면 금방 데뷔하는 구조였는데, 갑자기 우리 앞에 내보내야 하는 팀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조금씩 밀리게 됐다.
사실 1집 < Melody Quus >는 발매 당시 큰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 앨범에 'Don't Cry'부터 시작해 '당신을 위하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히트곡이 정말 많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망한 앨범이다. (웃음)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들어보면 알 테지만 거의 전곡을 작사, 작곡, 편곡을 맡다 보니 어떤 '의식' 같은 게 들어가게 되더라. 당시 내가 듣고 자란 음악과 대중적인 음악과는 괴리감이 있었으니까. 두 번째는 회사가 그런 홍보나 마케팅에 염세적이었던 것도 있었다고 본다. 그렇게 막 많은 돈을 투자해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마지막 결정타는 아무래도 소리바다의 존재였다. 분명 성적도 낮고 팬덤도 없는데 지나가는 남자애들이 전부 따라 부르더라. 이 친구들은 대체 어디서 우리 노래를 접했을까 싶었는데, 다들 소리바다에서 다운을 받아 CD로 구워 듣던 거였다.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 회사 사무실에 가면 빨간색 차압 딱지가 붙어 있는데 막상 길거리에서는 모두가 따라 부르고 있었으니. (웃음)
여기서 의식이란 록 발라드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나는 LA 메탈 키즈였고, 당연히 노래는 그렇게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경향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혁건이와 궤가 맞았던 거고. 고음 구간 역시 철저히 계산해서 빌드업한 요소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한 파트 쉬어가고자 넣은 트랙일 정도로.
그렇다면 LA 메탈 밴드 중에서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누군가.
머틀리 크루나 L.A. 건즈, 아니면 스키드로우. 영국 출신 중에서는 데프 레파드를 좋아한다.
확실히 당시 스타일로 치면 역행이다.
그런 음악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전성기였고, 내가 활동할 2003년에는 너바나의 등장으로 얼터너티브 열풍이 한 차례 분 데다 이미 린킨 파크까지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 LA 메탈을 들고 나타난 거다. 당시 프로듀싱을 맡은 부활의 김태원 형이 “이 음악이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게 맞냐”라고 물어봤다. 맞다고 하니 “희한한 놈이네” 이러더라.
그러고 보니 1집에 김태원이 참여했다. 도움을 많이 받았는지.
앨범도 앨범이지만 음악가로서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태원이 형은 우리가 음악계에 접어들어 처음으로 만난 프로 뮤지션이었다. 선배가 준 가이드에 반발도 했지만, 결국은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중에 가니 큰 영향력을 행사하더라. 그 덕에 우리는 지금까지도 마약에 단 한 번도 손을 대본 적이 없다. 늘 항상 녹음실에서 술을 드신 태원이 형에게 마약의 폐해에 대한 세뇌 교육을 매일 받았으니까. (웃음)
또 어떤 말이 있었나.
음. 코러스를 쌓을 때 “알 수 없게 쌓아야 해”라는 말을 늘 항상 했다. 그래서일까, 아직 음악을 만들 때는 태원이 형이 알려준 노하우대로 알 수 없는 그 느낌이 나오도록 코러스를 쌓으려 한다. 이번 신곡 '바람의 시'에 나오는 코러스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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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번 JTBC 방송을 기준으로 본격적인 재결합을 한 것이라 봐도 될까.
표현은 괜찮은데 확신은 못 할 것 같다. 방송은 그렇게 나가겠지만, 앞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랄까. 물론 지금은 20주년을 그냥 즐기고 있고 너무 행복한 상황이다. 그래서 이번에 신곡을 두 곡 제작했다.
간단하게 소개해 줄 수 있을까.
'너에게 닿기를'은 동양적인 느낌의 팝 록이라 보면 된다. 흔히 J록 같은 느낌이다. '바람의 시'는 멜로디와 가사가 이쁜 남녀노소 좋아할 곡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전부 이 곡을 뽑더라. 약간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 같은 스타일의 곡이다. 처음 JTBC 방송국에서도 AI와 듀엣을 펼칠 곡을 고를 때 '바람의 시'가 30대 초반 작가분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최근 JTBC < 리얼라이브 >에 출연했다. 무대 위에서 '당신을 위하여'를 같이 부를 때 어떤 감정이었나.
음, 내가 20대 시절 무대 위에서 느꼈던 그 풍경과 향기는 타임머신이 개발되지 않으면 다시 느낄 수 없지 않나. 그래서 그 감각을 다시 조우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혁건이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무대 위에서 일어서서 'Don't cry'를 들을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AI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괜히 울컥하더라.
'Don't cry'의 2023년 버전이 나왔다. 20주년을 맞아 준비한 또 하나의 자기표현이 아닌가.
앞서 올 한 해가 너무 감사하다 말한 이유가, 좋은 일들이 순식간에 다 찾아와서였다. 가만히 있었는데 어느 날 한 회사에서 갑자기 전화가 와 'Don't cry' 2023년 버전을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동시에 JTBC 측과도 이야기가 잘 되어 다큐멘터리를 찍게 됐고. 어떻게 이런 좋은 일이 연속으로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당신을 위하여'의 새로운 버전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렇게 IZM과 인터뷰를 하게 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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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에게 김혁건이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동반자라는 말이 가장 맞는 말 같다. 우리는 평생 싸워왔고, 지금도 싸운다. 아마 앞으로도 싸울 거다. (웃음)
음악적인 면에서 견해가 달라 빚는 충돌은 없는지.
음, 예를 들면 이번 '바람의 시'에서 고음 구간이 한 번 들어간다. 혁건이는 고음을 빼자는 주장이고, 나는 여기서 끝까지 쳐줘야 완성이 된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훅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람이 되어”하는 구간에서 딱 끊어야 하는데, 혁건이는 멜로디를 좀 더 끌자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제 그걸로 싸우는거다. 그런 디테일한 면에서 서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식이다. (웃음)
김혁건은 임팩트나 대중적 호소력에, 이시하는 완성도나 전체적 통일감에 집중하는 스타일 같다.
맞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1집 때 타이틀을 두고 둘이 엄청 싸운 적이 있다. 혁건이는 'Don't cry' 파였고 나는 '당신을 위하여' 파였다.
그러고보니 'Don't cry'도 고음 가창 부분을 제하면 소프트 팝 아닌가.
맞다. 근데 그런 게 아니고선 풀리지 않는다. 나는 딱 들었을 때 귀에 걸리는 무언가 있어야 한다. 없으면 심심하다. 누군가 내게 단 하나의 밴드를 꼽으라 하면 나는 늘 항상 퀸을 뽑는다. 그들의 음악은 스트레이트하게 가다가도 굉장히 드라마틱한 변주가 등장하지 않나. 그게 나에게는 바이블과 같았다. 'Don't cry'도 처음에는 중간에 템포가 갑자기 빨라지는 구간이 들어가는 'Bohemian rapsody'스러운 7분짜리 대곡이었다. 나중에 태원이 형이 잘라냈지만. (웃음)
왜 그랬을 것 같은지.
일단 내가 좋아했던 LA 메탈 같은 음악은 대한민국에서 히트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서태지가 처음 랩을 벤치마킹해서 히트했듯, 나도 이걸 들고 와서 히트만 시킨다면 제2의 서태지가 되리라 생각했던 거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많은 대한민국 뮤지션이 그걸 왜 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전망이 좋지 않으니 안 한 거겠구나 싶었다.
당시 김혁건 씨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그때가 2012년이었다. 그 당시 내가 혁건이랑 한 3년 정도 안 보다, 입대 직전에 만나 술 한잔을 했다. 경현이는 계약이 끝나서 회사를 나가겠다 입장을 밝힌 상황이었고. 근데 마침 너무 웃긴 게 입대날이 똑같은 거다. 서로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담소를 나누고, 그러면 제대하고 나서 다시 만나 이야기하자며 헤어졌다. 그렇게 다시 만나 의기투합을 한 뒤, 둘이 회사를 찾아가 가이드 보컬까지 다 따고 방송 섭외까지 다 끝내놓은 상황에 사고가 터진 거다.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
더 크로스 다시 하자며 “내가 기다릴게”라고 말은 해줬지만 사실상 내 음악을 더 할 수는 없겠다는 예감이 있었다. 혁건이는 지금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앉으면 기립성 저혈압으로 기절해 버릴 정도로 심각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이제 그때 다른 사람들이 돈을 주고 곡 써달라고 하면 전부 다 써주고 그러던 시절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혁건이가 휠체어에 앉아 애국가를 부르는 영상을 내게 보내줬다. 그때 한 줄기의 빛을 본 느낌이랄까, 희망을 느꼈다. 아마 혁건이 본인은 “내가 이 만큼 회복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는 뜻이었을 거다. 사실 나나 소속사 사장님이나 혁건이가 스스로 생을 마감할까 봐 문병을 갈 때마다 불안해하고 걱정했던 것도 있다. 혁건이가 음악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죽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얻을거라 생각했는데, 그 응답으로 보내준 게 아닐까 싶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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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건의 보컬에 대해 평가한다면.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KOMCA) 정회원이 되고 나서 처음 총회장에 참석했을 때 겸손을 배웠다고. 그 안에 800명 정도가 와 있고 제일 앞줄에 '뽀뽀뽀'를 쓰신 마상원 선배님이 계시고, 내 바로 윗대가 유희열, 윤종신… 이런 와중에 도대체 내가 어떻게 정회원이 된 건가 싶었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겸손해지는 느낌 말이다. 이 거대한 바닷속에서 작은 물줄기라도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나에게는 모두가 가지지 못한 악기가 하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게 김혁건의 보컬이다. 그 악기는 엄청나게 음역도 넓고 음색도 굉장하다. 그 사실이 그런 저명한 작곡가들 사이에서 나를 차별되게 해주고 지탱하게 해준다. 김혁건의 보컬은 내게 자부심이고 자존심이다.
2대 보컬인 김경현은 어떻게 생각하나.
혁건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만난 인연이라면 경현이와 나는 어른들이 주선해 준 커플인 셈이다. 회사가 엮어준 인연이다 보니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었고, 계약 기간이 끝났으니 자기가 가고 싶던 길을 간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현이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동생이다. 음악을 떠나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고 지금도 연락을 자주 한다.
김경현 씨와 팀을 이루자 많은 사람이 오해하지 않았나. 불화설도 돌았고.
충분한 설명이 없었기에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나한테 큰 결정권이 없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팀 메이킹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정말 많이 받았다. 물론 그때 적극적인 해명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딱 하나다. 그렇게 되면 혁건이랑 나는 진짜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
2집은 어떻게 만들었나.
그때 도레미레코드 소속이었는데, 목표치를 다 채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더크로스의 이름으로 한 장을 더 내야 했다. 나는 멤버가 바뀌었으니 그룹명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기각당하는 바람에 그냥 써달라는 대로 써서 앨범을 냈다. 혁건이와 함께 내지 못한 곡도 몇 개 넣고, 나머지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대로 응했다. 김경현이라는 처음 만난 친구와 맺어준 것도 회사의 의지였고, 나 때문에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했다는 뉘앙스로 말하다 보니.
그래도 이시하의 강점은 2집에 담긴 '사랑하니까'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그 곡 역시 더크로스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내가 저작권 협회의 정회원이 된 건 '사랑하니까'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해 싸이월드에서 연간 BGM 순위에서 7위를 했고 컬러링으로도 많이 사랑받은 걸로 기억한다. 경현이가 이런 팝적인 멜로디에 잘 맞는 목소리다. 아쉬운 게 있다면, 음원차트 1등도 기록했는데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기에 저작권료 자체는 많이 받았어도 회사 입장에서는 적자가 나왔고, 급해진 회사가 이를 기점으로 더 크로스 음악에 더 많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비운의 곡이다.
오히려 계속 팝 쪽으로 갈 생각은 안 해봤는지.
음악으로 돈을 벌려고 생각하는 순간 음악이 안 나온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하니까'의 경우에는 당시 좋아했던 타마키 코지(Koji Tamaki) 특유의 간결한 맛을 살리고 싶다는 의지로 만들었지만. 뭔가 조폭도 술집에서 술 한 잔 먹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애잔한 가사를 쓰고 싶었다.
3집은 어떻게 평가하는지.
내 안의 록적인 부분을 빼고 말랑말랑한 부분만 갖다 넣은 음반이다. 예쁜 멜로디를 예쁘게 포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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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로스의 베스트 곡을 다섯 개 꼽는다면.
유명한 곡 중에서는 '당신을 위하여' '사랑하니까' 'Don't cry'. 그 외에는 2015년도에 발표한 '항해'와 2020년도에 발표한 '송곳'. 이렇게 다섯 곡을 뽑겠다. '항해'와 '송곳'은 혁건이가 다치고 나서 세상에 나온 곡이다. 여러모로 우리 둘에게 처한 역경을 결국 이겨내고, 음악적으로나 메시지적으로나 어느 한 부분에서도 포기한 면 없이 낼 수 있던 싱글이니까.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 준 곡이다.
이시하의 작품 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뭔가.
음, 예를 들어 좋은 옷을 입고 명품을 걸치고 클럽에 가서 고급 샴페인을 마시는 사람의 플레이리스트에는 굳이 내 노래가 없어도 좋다. 하지만 이른 아침에 머리도 채 마르지 않은 채 출근을 하고, 누군가를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곁에는 내 음악이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 힘든 시간을 겪고 있을 때 잠깐의 위로를 건네줄 수 있는 그런 음악 말이다.
나를 만든 음악가는 누구인가.
신해철의 < Myself >. 라디오로만 음악을 듣던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주고 산 테이프다. 여전히 버릴 게 없는 음반이다.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신해철 선배님이 살아계셨으면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마주쳤을 텐데 한 번도 감사 인사를 못 드렸다는 점이다.
그다음으로는 퀸의 < Live Killers >. 초등학교 5학년 때 신해철에 심취했던 감정을 중학교에 이르러 터트린 라이브 앨범이다. 동시에 본 조비의 < Slippery When Wet >도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는 이제 신해철님이 만든 넥스트(N.EX.T)로 넘어갔다.
기억나는 건 우리 세대가 고등학교 한 반에 학생들이 대부분 엑스제팬 CD를 가지고 있을 시절이다. 뭐 사실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제이팝에서 한국에 없던 스피드 메탈과 서정성을 익혔다. 최근에 MAMA에서 요시키가 아이돌과 함께 'Endless rain' 무대를 꾸민 걸 보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하더라. 방송에서는 틀지도 못하고 내가 숨어서 듣던 음악이 이제는 우리나라 가수와 함께 나오는 시대가 왔구나 싶어서.
음악가로서 목표가 있다면.
이제는 '완주' 하나 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톱스타처럼 주목받고 떠오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럴 필요도 없고. 다만 음악을 하나 냈을 때 다음 음악을 내도 되는 명분 정도의 성적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진행 : 임진모, 손민현, 장준환, 한성현
정리 : 장준환
사진 : 한성현

















